default_setNet1_2

6·25전쟁 제74주년을 맞아, 시대와 세대를 넘어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기사승인 2024.06.21  08:20:25

공유
default_news_ad1

- - 6·25전쟁, 더 이상 잊힌 전쟁이 아니다. “진정으로 승리한 전쟁”으로 기념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우리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위대한 헌신으로 우리가 이룬 대한민국의 “놀라움(Amazing)”의 발전의 성과도, 남북 분단의 아픔도 그날에서 비롯되었다.

 

- “6ㆍ25전쟁”이란「참전유공자 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약칭: 참전유공자법) 제2조(정의)」에 따라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사이에 발생한 전투 및 1948년 8월 15일부터 1955년 6월 30일 사이에 발생한 전투 중 별표의 전투를 말하고 “유엔 참전용사”란 유엔참전용사의 명예선양 등에 관한 법률( 약칭: 유엔참전용사법) 제2조(정의) 에 따라 6ㆍ25전쟁에 참전한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군 소속의 군인을 말하며 “유엔 참전국”이란 6ㆍ25전쟁에 참전한 국제연합 회원국으로서 별표의 국가를 말한다.

 

- 7월 27일은 유엔(UN)군 참전의 날이고 11월 11일은 유엔 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이다. 6ㆍ25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유엔 참전국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고 이들을 유엔 참전국과 함께 추모한다.

 홍순철「서울 중랑교육발전협의회 회장, 중랑구청 교육발전위원회 교육여건개선 분과장, 대한교육신문 논설 주간, 한국문예연수원 교수, 국민비전 수석부의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서울 중랑구 협의회 고문, (前) 학교법인 송곡학원 이사장, 청소년단체 세계도덕재무장 한국본부(MRA/IC) 서울 총회장, 신현고등학교 교장」

 

■ 국립서울현충원 현충탑의 비문에는 노산 이은상이 지은 헌시(현충 시)가 새겨져 있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마음 깊이 울림을 주는 글귀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 조국을 원수(怨讐)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 내어 /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 흘러온 값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서 /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 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곡. 6.25의 노래다「노래로 배우는 한국현대사>6.25노래(6·25전쟁)>6·25전쟁 (archives.go.kr) 국가기록원」.

 

□ 6·25전쟁 74주년을 맞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웠던 전쟁이다. 이날은 후세들에게 6·25전쟁의 참상과 역사적 교훈을 상기, 참전용사의 위훈과 명예 선양, 국민의 호국정신 및 안보의식을 북돋우는 행사를 한다.

 

○ 국가보훈부는 6·25전쟁 제74주년 행사를 2024년 6월 25일(화) 10시, 엑스코 5층 오디토리움(대구시 북구)에서 6·25전쟁 참전유공자, 정부 및 군 주요인사, 참전국 외교사절, 학생 등 1,300여 명이 착석하여 참전 국기 입장, 기념 공연, 기념사, 참전부대기 입장 등의 식순으로 연다.

 

※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을 2024. 7. 27.(토) 10시, KBS홀에서 국내외 참전 용사, 정부 및 군 주요 인사, 군 장병 및 학생 등 1,000여 명이 참석하여 포상, 기념사, 기념 공연 등 식순으로 연다.

○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개시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만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된 전쟁이었다. 전쟁기간 양측은 38도선을 각각 3회씩이나 넘나들고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까지 오르내리며 전 국토의 80%에 달하는 지역에서 전투하였다.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인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1950년 6월 27일 제2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의 이름으로 연합군을 파병할 것을 결의하였다. 전쟁 기간 이들 다국적군으로 참전한 UN군 참전용사들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나지도 못한 사람’들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전장이나 후방지원에 목숨을 바쳐 명예롭게 싸웠다. 전쟁의 상흔과 평화의 소중함을 기억하고자 그 의미의 되새기는 국내외 현충 기념(추모)시설에서 그날을 돌아본다.

 

6·25전쟁 기간(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 UN 22개 참전국<16개 전투지원국(미국, 영국, 캐나다, 튀르키예, 호주,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룩셈부르크), 6개 의료지원국(덴마크, 독일, 인도, 이탈리아, 노르웨이, 스웨덴), 41개 물자지원국)>, 1,957,733명의 유엔 참전용사의 위대한 헌신(전사 / 사망 37,902명, 부상 103,460명, 실종 3,950명, 포로 5,817명 계 151,129명)의 토대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함께 노력하여 만든 대한민국의 놀라운(Amazing) 70년, 성공의 역사에 대하여 우리 국민들과 22개 참전국이 함께 자부심을 느끼도록 6·25 참전유공자분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한 우리의 감사 마음을 담는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통계로 본 6·25전쟁’(2014.6.), UN평화기념관 (unpm.or.kr), UN평화기념관 방문을 환영합니다. 국내 페이지 입니다. (unpm.or.kr), UN평화기념관 방문을 환영합니다. 국외 페이지 입니다. (unpm.or.kr), 현충시설정보서비스 (mpva.go.kr)」.

 

6·25전쟁 중에 진행되었던 휴전회담은 전쟁이 발발된 지 3년 1개월 만에, 회담이 개시된 지 24개월 17일 만에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클라크(Mark Wayne Clark)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정전협정을 체결하였다. 대한민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정전 반대 운동을 계속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협정문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 협정문은 영문으로 작성된 총 36쪽 분량의 사본으로, 1953년 8월 31일 한국 정부가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접수하였다.

 

※ 한반도 내에서 일어난 국내 전이자, 20개국 이상의 국가가 참전한 국제전이기도 한 6·25전쟁의 상황들은 국가기록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6.25.전쟁과 관련한 자료에 대하여는「국가보훈부 (mpva.go.kr), 전쟁기념사업회 전쟁기념관 (warmemo.or.kr), 행정안전부 국가기록포털 (archives.go.kr), 6.25 전쟁 (archives.go.kr), <국가기록원 나라기록 컬렉션/토픽 (archives.go.kr) :  6·25 전쟁 개요 등 6.25전쟁 발발부터 휴전협정 까지 개관, 전쟁의 배경 및 원인, 단계별 전개과정, 휴전협정, 전쟁의 결과 및 영향 등과 주요 관련기록물 소개, 6.25전쟁 연표, 전선의 변화, UN참전국과 주요 관련기록물 소개, 전쟁 속의 통계를 소개, 기록물 원문 및 설명정보(생산맥락 정보 및 내용설명) 제공>, 나라사랑배움터 - 호국의 혼 > 호국영웅 (mpva.go.kr), 나라사랑배움터 - 호국의 혼 > 호국역사 (mpva.go.kr), 전쟁기념사업회 전쟁기념관 (warmemo.or.kr), 6.25전쟁기념관에서 반드시 보아야 할 10점의 6·25 전쟁 컬렉션 — Google Arts & Culture, 한국의 비무장지대 — Google Arts & Culture, Home : 부산광역시 임시수도기념관 (busan.go.kr),, 국립수목원 - 연구 > DMZ자생식물원 (forest.go.kr),, DMZ 자생식물원 — Google Arts & Culture, DMZ 박물관 (dmzmuseum.com), 인천상륙작전기념관 (landing915.com), UNMCK 재한유엔기념공원」에서 확인 한다.

 

○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2018년 6월 한국 전쟁 참전 유엔군 프랑스 대대의 기록을 담아 「한국전쟁 참전 유엔군 프랑스 대대 전적지(Lieux de mémoire du Bataillon français de l’ONU en Corée」를 소개하는 책자를 발간했다「Untitled (ambafrance.org)」.

※ 줄 장-루이(JULES JEAN-LOUIS, 1917∼1951) 소령은 누구인가. 그는 한국 전쟁 당시 프랑스 UN 대대의 군의관이었다. 그는 지뢰밭에서 두 명의 한국군을 구출하던 중 전사했다. 그를 기리기 위해 주치의의 동상이 한국 홍천(강원도)에 세워졌다.

 

“... 1951년 4월 말, 중공군은 재정비하고 공격을 재개한다. 중공군은 수적으로 우세했다. 그리고 산악지대 침투를 통해 유엔군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려 했다. 프랑스 대대의 군의관이었던 줄 장-루이 소령은 2명의 한국인 병사를 구하려다 지뢰를 밟아 1951년 5월 8일 산화한다. (p.49)“「.장 루이 박사 - 주한 프랑스 - 주한 프랑스 대사관 (ambafrance.org), 쥘 장 루이(Jules Jean-Louis), 사나리엔(Sanaryen)과 한국의 영웅 - Mairie de Sanary-sur-Mer (sanarysurmer.com)」.

※ 국가수호 현충 시설 쥴·장 루이 소령 상(SITE DU MONUMENT DU MEDECIN-COMMANDANT JULES JEAN-LOUIS)은 쥴·장 루이 공원(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두촌면 장남리 55)에 있다.

 

쥴·쟝 루이 공원의 쥴·쟝 루이 상(像)으로 올라가는 계단 하나하나에 적힌 글이 깊은 울림을 준다.

 

『“프랑스 청년의 뜨겁고 숭고한 삶의 궤적 / 진정한 군인이 되고 싶었던 34년의 짧은 삶을 마감한 쥴·쟝 루이의 생애 / 우리들은 그를 살아 있는 성인이라 불렀다. / 삶과 죽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교차하는 이 험난한 전쟁터에서 / 쥴·쟝 루이는 우리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 11년간 총 대신 의약 가방을 메고 전쟁터를 전전하며 살아온 시간 / “전우들을 두고 나만 갈 수는 없다. 그들을 치료해 주어야 한다.” / “돌봐야 할 부상자들이 이렇게 많은데 나 혼자 어떻게 철수할 수 있는가?” / 그리고 이제 그는 안식처를 찾아 떠난다. 70여 년 전 그가 짧은 생을 불태우고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불과 5년 후, 호주는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인민군은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했다. 북한군이 서울로 몰려들자 22개국이 남한을 방어하기 위한 유엔의 다국적 군사 개입에 동참했다.

호주 해군(RAN), 호주 공군(RAAF), 호주 정규군(ARA)에 소속된 17,000명 이상의 병력은 전쟁이 시작된 직후 투입되어 이후 3년 동안 한국 방위에 복무했다. 340명의 사망하고 1,216명 이상이 상처를 입었으며 30명이 전쟁 포로가 되었다「한국 전쟁, 1950-53 | 호주 전쟁 기념관(Australian War Memorial) (awm.gov.au),한국 전쟁, 1950-53 | 호주 전쟁 기념관(Australian War Memorial) (awm.gov.au)」.

 

○ 미국 컬럼비아 특별구 워싱턴 DC의 중심부에 위치한 내셔널 몰 & 추모 공원(National Mall & Memorial Parks)에서 가장 감동적인 광경 중 하나인 한국 전쟁 참전 용사 기념관(Korean War Veterans Memorial / 한국전 참전 기념 공원)에 들어서면 자유의 대가 “여러분 앞에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이 서 있다. 178만 9천 명의 미국인 남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그들은 한국과 다른 유엔군과 함께 싸웠다. 이들은 함께 격렬한 전투와 가혹한 환경, 그리고 고향을 떠나 여러 달을 견뎌냈다.

그 안에 곡선 추모의 벽이 자리 잡고 있다. 전쟁의 인명 피해를 목격한 36,000명 이상의 미국인과 7,100명 이상의 미국인 중에서 주미한국증원회원, 전투 중에 전사한 카투사(KATUSA)·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미국은 전투지원 육․해․공군 연인원 1,789,000명이 참전(133,996명, 전사 / 사망 33,686명, 부상 92,134 명, 실종 3,737명, 포로 4,439명)이다「한국 전쟁 참전 용사 기념관 (미국 국립 공원 관리청) (nps.gov)한국전 참전용사 기념재단 – 명예, 교육, 영감 (koreanwarvetsmemorial.org), UN평화기념관 방문을 환영합니다. 국외 페이지 입니다. (unpm.or.kr), 재헌납된 한국 전쟁 기념관, 전몰자 명단 미국 국방부 >> 국방부 뉴스 (defense.gov)」.

 

□ 1983.6.30. 밤 10시 15분 6.25 특집 한국방송공사(KBS)의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전파를 타면서 이산가족 상봉 장면은 온 국민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1953.7.27.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멈췄지만, 이산(離散)의 아픔은 기약 없이 지속하였다「남북이산가족찾기 (unikorea.go.kr)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

 

○ 한국전쟁 관련 노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전선야곡, 남편을 전장으로 떠나보낸 아내의 노래, 단장의 미아리고개, 굳세어라 금순아, 님 계신 전선, 6·25 창부타령, 처녀 뱃사공, 두만강아 전해다오, 피난길 고향길, 휴전선 나그네, 삼팔선의 봄, 슈샨 보이, 판문점의 달밤, 노병은 사라지고, 전우야 잘 자라, 내가 마지막 본 평양, 님 계신 전선, 단장의 미아리고개,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이 있다「지역N문화 | 지역문화 # (nculture.org)」.

 

○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묻힌 시인 박인환은 1950년에 부산에 모인 김규동 이봉래 등과 모더니즘 시를 지향했던 동인지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검은 강〉,〈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했는데, 이들 시는 8·15해방 직후의 혼란과 6·25전쟁의 황폐함을 겪으면서 느꼈던 전쟁의 불안과 공포를 벗어나 인간적인 것을 확신하고, 시대와 역사의 추진력을 인식하려는 전개 방향이 보인다. 특히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이듬해 경향신문사가 대구에서 전선 판 신문을 발행하면서 그는 종군 기자로도 활약했다. 당시 전쟁에 참여한 중공군 얘기를 간접 취재한 기사와 전투로 폐허가 된 서울 외곽을 르포 한 기사가 눈길을 끈다. “…시흥, 안양 도로 연변의 주택은 지난번의 전투로 폐허가 되었고 혹시 남아 있는 가옥이라고 해도 공산군의 약탈로 가재는 사방에 흩어져 그 참상이야말로 필설로 표현키 어려울 뿐 눈물이 솟아날 것만 같았다.”「노량진에서 본사 특파원 민재정, 박성환, 박인환 발. 경향신문 1951.2.20.·21일 자, [경향사람들]‘목마와 숙녀’의 시인, 한국전쟁 터지자 종군기자로도 ‘맹활약’ - 경향신문 (khan.co.kr) 2016.02.19.」

 

박인환은 강원도 인제군 상동리에서 태어났다. 열한 살 때 고향을 떠나 서른 살까지 살면서 누구보다 고향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는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물지 않았던 영향을 받은 최고의 로맨티시스트로 알려졌지만, 가슴 밑바닥에는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기억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토지가 지금은 내 고향 / 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회화(繪畵) / 피 묻은 전신주 위에 / 태극기 또는 작업모가 걸렸다. / 학교도 군청도 내 집도 / 무수한 포탄의 작렬과 함께 세상엔 없다……. 어려서 그땐 확실히 평화로웠다. /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 미래와 살던 나와 내 동무들은 지금은 없고 / 연기 한 줄기 나지 않는다…. 밝은 달빛 은하수와 토끼 고향은 어려서 노래 부르던 그것뿐이다….” 이 시는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박인환 시인이 종군기자로 활동할 때 고향인 인제에 와서 지은 ‘고향에 가서’이다. 고향에서 자신의 현재와 과거를 비교한다. 지금의 스산함, 적막함, 전쟁의 참상을 설명해 주는 글이다「고향에 가서 | 어문 | 공유 마당 (copyright.or.kr), 박인환 창작년도 1955.10.15., 한국저작권위원회」.

 

한국 근대 서양화의 거장 화가 대향(大鄕) 이중섭은 제주도에 피난하려고 와 있으며 빈곤한 삶 속에서도 예술의 혼을 불태우며 시대의 아픔과 굴곡 많은 생애의 울분을 ‘황소’라는 모티프를 통해 분출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민족을 상징하는 ‘흰 소’를 그리며 흔들림 없는 의지를 보였고, 6·25전쟁 속에서 피란을 다니면서도 자기 작품을 계속해서 남겼다.

 

그는 일제의 국어 말살 정책에 반발해 한글 자모로 구성을 시도했다. 이중섭은 오산학교 시절부터 자신의 그림에 서명할 때, 중섭을 한글로 풀어 ‘ㅈㅜㅇㅅㅓㅂ’이라고 썼다. 당시는 일제강점기라 이름조차 일본 이름으로 바꿔야 하는 암울한 시기였기에 한글로 표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용기 있는 주장이었다. 이중섭은 그림 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담뱃갑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에 시달렸다.

 

1952년 2월 국방부 정훈국 종군 화가단에 종군 화가로 입대해 가족을 돌볼 수 없게 된 그해 7월 아내와 자식들을 일본의 처가로 떠나보낸 이중섭에게 편지는 가족과 자신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전쟁 통에 생이별했으니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그 시절 이중섭에게는 오직 가족과 그림뿐이었을 것이다. ‘길 떠나는 가족’ ‘해변의 가족’ ‘꽃놀이 가족’ ‘춤추는 가족’ ‘아버지와 두 아들’ 등은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한 그림들이다.

 

1950년대를 ‘제주 문학의 부흥기’로 부를 수 있다면 ‘백치 아다다’로 유명한 소설가 계용묵을 들 수 있다. 해방 전후의 암흑기와 4·3 전후 혼란기를 거쳐 1950년대 초에 심한 좌절감에 빠져있던 제주의 문학 지망생들이 계용묵으로 대표되는 피난 문인, 동인 활동, 잇따른 등단 등 제주 문학의 흐름에서 종전과 다른 활동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가, 영화각본가 김이석은 1951년 6·25 당시 월남하여 중부 전선 종군 작가 단에 소속되어 작품 활동을 한. 월남 작가로 한국적인 정(情)과 한(恨)을 다루고 한국전쟁으로 인한 고통과 전후의 혼란상 등을 그린 실비명(失碑銘)과 ‘뻐꾸기’ 등 작품을 남겼다.

 

김이석의 실비명(失碑銘)은 1954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일제 치하를 배경으로 하여 아내가 죽은 뒤, 외동딸 하나만을 생각하며 그녀를 의사로 만들기 위해서 10여 년간 오직 일만 해온 홀아비 인력거꾼 덕구의 꿈은 의사가 된 자신의 딸 도화를 인력거에 태우고 달려보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건 딸이 기생이 되자 좌절에 빠지는 가난한 인력거꾼 부녀의 이야기를 다룬 홀아비 인력거꾼인 덕구와 그의 외동딸인 도화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김이석의 뻐꾸기(1956년)는 소박한 인물의 삶을 다루면서 휴머니즘적 애상미를 느끼게 하는 작품으로 1년 동안 실직의 나날을 보낸 주인공 ‘나’가 버스로 여덟 시간이나 걸리는 H까지 일자리를 구하러 가는 여정에서 겪는,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점경(點景)으로 하고 있다. 또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굴절된 삶의 인물들과의 사건을 다루면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산골을 배경으로 하여 도시적 일상을 벗어난 생활을 그려내면서 도시인의 각성과 애조 어린 휴머니티를 안겨 준다.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조명한 1·4후퇴 때 월남한 지식인들의 실직자 비애를 그린 비참한 삶의 모습 기록과 같이 사적 체험을 위주로 서술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식민지 시대로부터 6·25남침의 전후까지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의 한국 지식인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영원한 어린이들의 벗 강소천(姜小泉)은 동란 이후 전개된 우리나라의 아동문학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그를 빼놓고 이야기가 될 수 없다. 1951년 1·4후퇴 때 가족을 두고 월남(越南), 대구에서 생활. 이 무렵 중부전선 종군작가 단으로 들어 있으면서 작품 활동을 재개하였다.

 

소천의 삶에서 또 한 번의 큰 변화가 찾아오는 것은 6.25전쟁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공산주의를 피해 1950년 12월에 흥남 철수 당시 마지막 배를 타고 혈혈단신으로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며 월남, 거제도에 이어 다시 부산으로 와 소설가 김동리 등 많은 문인과 옛 친구를 만났다. 그는 1951년에 육군 정훈부대인 772부대의 문관으로 근무하면서 대전일보 1951.3.28. 자에 자라는 대한(大韓)이라는 12연(聯)으로 구성된 월남 후 처음으로 발표한 동요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고향에 대한 강렬한 향수를 들어낸 작품을 남겼다. 쉽고 재밌는 동시와 동요 그리고 월간 어린이 다이제스트를 창간하고 주간이 되어, 전쟁 통에 읽을거리가 없던 어린이들에게 우리말로 된 어린이동화를 들려줬고, 1·4 후퇴 때 헤어진 가족과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꿈을 찍는 사진관’과 ‘그리운 언덕’을 남겼다「영원한 어린이의 벗 - 강소천 (kangsochun.com)」.

 

※ 김영식 지음, 망우리 사잇길에서 읽는 인문학 그와 나 사이를 걷다(호메로스, 개정 3판 2018.5.17.) 55쪽 강소천 편에서는 중랑 교육발전협의회의 창의적 체험 봉사활동(강소천)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으로 온 북한이탈주민을 포용하고, 권익을 향상하며, 남북 주민 간 통합문화를 형성하고, 통일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약칭: 기념일규정)[시행 2024. 5. 21.] [대통령령 제34519호, 2024.5.21., 일부개정] 이 지난 5월 21일(화) 공포되어 7월 14일은 제1회 「북한이탈주민의 날」로 국가 기념일이 되었다.

 

7월 14일은 북한이탈주민의 법적지위와 정착지원 정책의 근간이 되는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약칭: 북한이탈주민법)」이 시행(’97.7.14.)된 날이기도 하다.

 

○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서우(瑞雨), 자우(慈雨, 滋雨)라는 말이 있다. 생물의 생장을 돕는 고마운 비, 오래 가물다가 내리는 단비를 이르는 말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받은 상처는 모래에 기록하고 받은 은혜는 대리석에 새기라(Write injuries in dust, benefits in marble.)고 했다. 이렇듯 ”유엔 참전용사들의 은혜 깊이 감사드리며 '중요한 것은…. 이들을 잊히지 않도록 하라'이다.

 

6.25전쟁 제74주년을 맞아, 시대와 세대를 넘어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죽은 뒤에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을 이르는 결초보은(結草報恩)의 기억과 감사의 호국 보훈을 새기며 민주 평화통일을 마음에 담는다.

 

 

 

중랑방송 webmaster@cnbcnews.net

<저작권자 © 중랑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