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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엔 내가 없었다 - 신춘몽

기사승인 2020.09.21  10: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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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엔 내가 없었다

 

그날,

산자락을 돌아가는 버스는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듬성듬성 잘려나간 나무 둥치 사이로 연붉은 진달래꽃이 교태를 부려서 인가?

 푸른 띠를 두른, 영구차는 잘난 척을 어지간히 하고 있었다.

지가 힘든 것이 울 수도 없어 눈물만 뿌리고 있는 나보다, 더 할까를 따지고 싶었지만, 내 아버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나도 침묵했었다.

“그날에는”

유난히도 꽃을 좋아하던 아버지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온 천지에 흐드러져  물들었던 “ 그 해 봄  그날에 멀고 먼 길을 떠나셨다.

상주라고는  딸 하나를 달랑 남겨 두시고, 눈물 뿌려 질퍽이며 가셨다.

뒤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가셨다.

산자락 햇볕을 끌어안은 아버지의 새 집은 파헤쳐 지고 있었다.

한 평일까, 두 평일까?  넓이를 알고 싶지 않은  땅 위에 새집 단장이 바쁘다.

틈새로 보여진 아버지의 방은 참으로 작았다.

어쩌나, 울 아버지 답답하시겠다.

아버지 방에 뭔지 모를 흰 가루를 뿌리고 있는 인부들을 보며, 능숙한 손놀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나는 어이없어 했다.

그날에 나는 그러고 있었다.

흰 가루를 골고루 펴 뿌리고 난 아저씨는 나에게 물었다.

“저 어, 관은 뺄까요?

예? 관~요? ~ 그러세요.

아버지는 내 말 한마디에 마지막 은신처에서 옮겨졌고 흰 가루가 뿌려진 한 평짜리 땅속으로 내려가셨다.

나는 그날 아버지에게 안녕히라고 말하지 않았고 손을 흔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그날 그곳에 없었으니까?

인부들은 능숙하고 분주하게 삽질을 해대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 서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새집 위에서 여러 명의 남자들이 웃기지도 않는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아버지를 잃어버린 예식이라서 인지, 그런 짓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누워계신 위에 긴 장대를 꼿아 놓고, 그들은 구성진 노래를 부르며 빙빙 돌고 있었다.

저것은 또 무슨 희한한 짓거릴까 생각하고 있을 때, 둘째 외삼촌이 천 원짜리 한 장을 그 장대에 꽂는다,

막내 삼촌이나, 오촌 아저씨, 그리고 아버지 친구와 조카까지, 그런 행위를 하고 있는데,  어느새, 나도 그 장대에 지폐 한 장을 꽂고 있었다

빙글 빙글 돌며 땅을 다지는 행동이 달고질이라고 했던가?

너무도 오래된 일이라서 잘 모르겠다.

아니,  그날엔 그런 짓 이 무엇 이였는지 몰랐었는데, 수십 년 동안을 알려고도 알 필요도 없었으니까, 지금에서는  모르는 것이 당연할 것 같다.

죽은 자에게 주는 교통비라고 하니까 믿거나 말거나 시키는 대로 하였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망자의 교통비는, 구슬픈 노래 가락을 뿜어내던 아저씨들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됐다.

그때 나는 속았다는 생각과 함께 헛 웃음이 나왔는데, 그 웃음의 근원은 무엇 이였는지를 그것 역시도 그때나 지금이나 알고 싶지 않다.

그때는  어렸기 때문에서 인가 궁금한 일이 많아, 사소한 문제도 그냥 넘기지 않았었는데 아버지 장례 모시던 날에는 아무것도 궁금하지가 않았다.

장지까지 따라와 준 스님이, 아버지의 묏자리가 좋다며 집안의 모든 우환은 사라 질 것이라며 목탁이 깨져라 두드려 댔다.

그랬지만

모든 불행이 물러갈 것이라고 예언했던 말과는 반대로, 아버지의 49재를 준비하던 엄마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48일 만에 엄마도 아버지를  따라가셨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모셨던 “그날의 그 짓을 또 봐야 했고

처음 그날보다는 나도  익숙해졌다.

장대에 돈 두 잘 꽂았고, 달고질인지 흙을 밟는 행위도 이상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48일 간격으로 떠나신 두 분을 나란히 모셔놓고 산을 내려오는데 왠지 모를 헛웃음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그날 이후 수 십 년 동안을  그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고, 그날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열 수 없는 “옥합 속에 남겨두었다.

그 옥합 속에는 헛 웃음과 함께 또 다른 풀을 수 없는 숙제가 들어있는데

 두 번씩이나 먹었던 밥이다.

“그날  아버지를 땅속에 모셔놓고 묘지 식당에 들어섰는데, 우리 조문객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시끄러울 정도로 소리 높여 통곡을 했던 아버지의 사촌 여동생은 언제 울었냐 는 듯 입이 찢어져라 밥숟갈이 컸다.

 ,깔깔거리며 웃기까지 해서 징그러워 소름이 돋았다.

 사람들의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내가 이방인처럼 생각돼 서성이고 있을 때,

누군가가,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면서 나에게 밥을 먹으라며 끌어당겼다.

“산 사람?

그날, 그곳에는 모두가 살아있는 사람들인데  산 사람을 강조하는 것이 슬프면서도 화가 났다.

내 아버지만 죽은 사람이고, 내 엄마만 죽었을 뿐이지 모든 것은 살아 있었다.

민들레조차 홀씨가 되어 살아남았고, 굴러다니는 돌들까지도 살아서 꿈틀거렸다.

그랬는데 산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도 서럽고 무서웠다..

그날,

살아있는 어떤 사람이, 살아 있는 것 같은 나에게 밥과 국 사발을 드리 밀었다.

나는 살아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아니면 산 사람은 먹어야 한다는 말을 따르려는 듯, 너저분한 식탁에 코를 박고서, 미친 듯이 퍼먹었다.

산 사람은 먹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해 주려는 것 이였을까? 

많은 시간을 되돌려 생각해도 그날에 내가 먹었던 밥이 무엇이었는지가 생각나지 않는다.

40여 년 전에 내가  먹었던 그 참혹한 밥을,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강요 당하고 있는 현실이 할 말을 잃게 만든다.

하지만, 생각하기조차도 고통이라서 내가 만든 옥합에 가둬 버렸던 그 말을 오늘은 꺼내려 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밥을 먹어야 한다는 세상에서 제일 잔인하고 슬픈 말을 나는 오늘 하고 있다.

죽은 이를 따라가기가 살아남는 것보다 쉬울 때가 더 많다., 부모의 뒤를 따라가는 자식은 많지 않지만,  부모는 자식의 뒤를 따라가고 남겨진 것은 심장도 없는 빈 몸뚱이만 남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부모는 자식을 기억해야 하므로  밥을 먹어야 한다.

수 십 년 전에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내게 밥을 들이밀던 그 누군가처럼 말이다.

“그날  내가 밥을 먹었던 그곳에, 진정 내가 있었는지가 하릴없이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난 40년을 살아가고 있다.

그날 그 밥을 먹고서. 이제는 시간 저편에서 퇴색되어 가는 지난날이 되었기에

그날에 웃었던 웃음과 정체 모를 밥을 먹지 않아도 됐지만

,그날이

오늘도 꽃이 피면 아프다

수많은 시간들이 뒤엉켜 묻혀도, 불쑥불쑥 고개를 치켜드는

“그날은,

꽃샘추위 봄바람에도 얼음 골짜기를 더듬거린다.

“그날,

 나는 그곳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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